2012년 1월 27일 금요일

화투(花鬪)와 투전(鬪牋)



화투(花鬪)와 투전(鬪牋)



화투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부터도, 우리나라에는 화투와 비슷한 투전(鬪牋) 이나 수투(殊鬪) 라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이 놀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거주할 때부터 생겨났다는 기록도 보이며, 또한 조선 중기인 숙종(肅宗)때에 이르러, 당상역관(堂上譯官)이던 장희빈(張禧嬪)의 숙부 장현(張炫)에 의해서 고안되고, 또 퍼지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아마 그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치판은 어지러워, 노론(老論)과 남인(南人)간에 당파싸움을 하는 등, 정치싸움이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이처럼 혼란했던 정치싸움판에 장희빈(張禧嬪)의 숙부인 장현(張炫)도 휘말리게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 안에서 소일삼아 이 투전(鬪牋)을 고안하고 즐기던 것이, 이 놀이가 점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나 봅니다. 아래 글에 의하면 아예 우리의 놀이가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에도 전래되었다는 내용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백과사전류의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17세기 조선조 숙종대왕 때 역관이었던 장현(張炫-장희빈의 삼촌)이 당파싸움으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자 감옥에서 소일삼아 고안하였고, 이것이 양반계층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조선통신사를 통해 그 놀이 방법이 일본에 전래되었으며......

아무튼, 이렇게 투전(鬪牋)과 수투를 즐겨오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리나라를 왕래하던 쓰시마(つしま,対馬島)상인들을 통하여 화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는데(민족문화사 : 한국민속 대사전), 새로 들어온 화투에는 어려운 한자도 없고 숫자도 없이, 그저 이해하기 쉬운 그림만 그려져 있으니, 투전에 비하여 배우기 쉬웠음은 물론, 새로운 놀이에 대한 흥미와 재미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식이야 있건 없건, 남녀노소, 도시 농촌불문하고 급속도로 번져 나가게 된 것이지요. 아예 일제 강점기에는 근거는 없지만 우리 민족을 수렁에 빠트리기 위하여 장려까지 했다는 말도 전해질 정도로 급속도로 번져 나갔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화투(花鬪)를 일본에서는‘하나후다(はなふだ)’라고 하는데, 한자로 써보면 ‘화찰(花札)’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투전’을 한자로 써보면 ‘투전(鬪牋)’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화투라는 이름도 우리의 옛 놀이인 투전(鬪牋)과 일본어의 화찰(花札)의 결합에 의하여 ‘화투(花鬪)’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투전(鬪牋) : 두꺼운 종이로 넓이는 손가락 정도, 길이는 15㎝ 정 도로 만들어 그 위에 인물·조수(鳥獸)·충어(蟲魚)의 그림과 또는 시구나 문자를 그려 끗수를 나타낸다. 수투(殊鬪) : 몇 사람이 편을 지어 숫자풀이를 하며 노는 놀이. 길이 15cm, 너비 1.5cm 정도의 종이나 가죽 80장에 그림 같은 글자를 써 가지고 노는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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